탈북래퍼 화가 강춘혁
탈북래퍼 화가 강춘혁
  • 조주홍 기자
  • 승인 2017.03.0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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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그림으로 北 정권 변화시킬터"

"노래 그림으로 北 정권 변화시킬터"

탈북 래퍼 화가 강춘혁

“이건 내가 살아온 인생 절반의 노래, 그러나 어디선가는 아직도 못 듣네, 이 노랠…” ‘For the

freedom 중에서’

레퍼 강춘혁(31)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읊조리는 노래가사에는 짙은 애환이 묻어 있다. 두고온 북녘 땅 동포들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자신은 자유를 찾았지만, 북녘 동포들은 자유가 얼마나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 아직 모른다. 강춘혁은 남한사회에서 레퍼로 명성을 얻었지만 화가로도 입지를 굳히고 있다.

15년전 부모와 함께 사선 넘어와

강춘혁이 부모 손을 잡고 고향 함북 온성군을 떠나온 지도 어언 15년. 어린 시절 탄광촌에서 살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인 11세 때 부모 손을 잡고 사선을 넘어 북한 탈출에 성공했다. 탈북 동기와 여정은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다. 탄광 일을 하던 부친은 아내와 자식이 굶주리는 것을 보다 못해 중국에 숨어 들어가 얼마간의 돈을 벌었지만, 귀국 길에 북한군에 붙잡혀 감옥에서 영양실조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강춘혁의 모친이 찾아가 애걸복걸하며 뇌물을 주고서야 약간의 ‘특별휴가’를 얻은 부친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죽기를 결심하고 가족을 데리고 탈북을 결행했다. 중국 공안을 피해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남한에 오기까지는 소요된 4년여 세월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피맺힌 시간이었다.

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 강춘혁과 가족들은 ‘하나원’에서 적응교육을 마치고 정착금과 임대주택을 지원받았다. 소중한 자유는 찾았지만, 남한사회에의 적응은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가족과 함께 경남 밀양에 터를 잡았지만, 부친은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고 모친이 식당일을 해서 가족이 근근이 먹고 살았다. 강춘혁은 당시 16살의 나이여서 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지만, 학교에 적응이 안 됐다.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 무작정 상경한 그는 서울에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용직과 배달일 등 닥치는 대로 했다. 학업과는 점점 담을 쌓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원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너는 그림을 잘 그리니 그림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제게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았어요.”

다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은 강춘혁은 독하게 파고들어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패스하고, 홍익대 회화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강춘혁은 대한민국 미술 명문대학에서 익힌 탄탄한 회화 실력을 바탕으로 북한 실상을 담은 그림을 그려 몇 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그의 그림에는 자신의 이야기와 북한 어린이들이 학대 받는 아픈 사연 등이 담겨 있다. 한 젊은이가 힙합가수 차림으로 김정은을 야유하는 그림은 관람객들에게 어떤 카타르시스까지 제공한다. 북한 실상을 다룬 그림전시회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기를 끌었다.

강춘혁의 작품

디스하는 배틀보다 격려하는 배틀로 소통

“그림을 통해 남북한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싶었는데, 해외에 비해 국내에서는 관심이 적어 좀 서운했습니다.”

강춘혁은 바쁜 와중에도 북한의 실상을 음악에 담아 알리려고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Show me the money(쇼미더머니)’에 참가했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레퍼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강춘혁은 사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닌데, 노래작업을 할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입해 스스로도 대견스러웠다. 굳이 타고난 재능이라면, 가사를 잘 외우는 것인데,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과 연습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이리라.

“음악이 가진 대중성을 활용해 북한 정권이 변화하는 그날까지 북한의 실상을 계속 알릴 각오입니다.”.

음악 작업은 힙합 소속사 ‘스톤쉽’의 도움으로 이뤄졌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후원해 줘 지난해 12월에는 ‘For the freedom’을 발표했다. 도입 부분의 영어 나레이션은 작곡가 송윤서씨가 도움을 줬고, 후렴(Hook) 부분 피처링은 래퍼 3MIN(3미리)가 힘을 보탰다.

힙합의 특징은 랩 베틀에서 누군가를 ‘디스’(상대방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공격해 망신을 주는 것) 하는 것이지만, 강춘혁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런 문화를 따라가기 보다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누구를 디스 하는 베틀보다는 격려하는 베틀을 통해 힙합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더 깊이 소통하고 싶습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하고 싶었고, 노래를 통해서는 청각적으로 심중에 닿도록 힘썼다.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 그림과 노래를 택했던 강춘혁은 이들 도구와 가까이 하면서 어느덧 심취하게 됐다. 지금은 예술적으로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형식과 방법을 연구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아직 남한사회에 잘 적응을 못하는 새터민(탈북민)이 많아요. 사람답게 살겠다고 찾아온 남한에서 또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요. 이들에 대한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어렵게 수소문해서 강춘혁을 만난 곳은 목동에 있는 이대부속 목동병원 장례식장. 절친의 부친이 타개해 조문왔다는 강춘혁은 친구 곁에서 함께 밤을 세울 작정이다. 차디찬 밤바람이 왠지 따듯하게 느껴졌다.

조주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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