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째에 이른 중국 가정요리의 신세계를 선보이겠다
3대째에 이른 중국 가정요리의 신세계를 선보이겠다
  • 최금숙
  • 승인 2018.05.2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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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요리 락희안 LEXIAN 대표 이동혁

서울의 남가좌동, 연희천이 흐르는 주택가 근처엔락희안이라는 소문난 맛집이 있다.

이동혁대표, 그는 즐거움(), 행복(喜), 안(安) 이 세가지 요소를 만족시키기 위한 중화 요리집을 열고 있다. 식당 오픈은 2010. 그가 대표를 맡은지는 10년이 채 안된 시간이지만, 할아버지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반 세기를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할아버지 이연악, 아버지 이국태, 3대째인 이동혁, 그는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화교 3세로서 글로벌 홍보 회사를 다니다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과감히 자신이 하던 일을 버리고 이 사업에 뛰어든 계기와 포부를 들어본다.

. 중화요리집 ‘락희안’ 이동혁 대표. 그는 화교 3세대로서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중국의 산둥성 출신으로 1945년 마산에서 ‘신춘반점’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신 분이라고 한다. 참고로 화교(華僑)라는 단어의 화는 중국인을 지칭하고, 교는 중국인이 어디에서 살든 그 나라에서 임시로 거주하는 중국인 디아스포라(diaspora, 뿌리를 내리다)를 의미한다. 중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산 지는 역사적으로는 수 천년 전이지만 고대 이후, 현대사로 편입된 1909년 청국과 1929년 중화민국 헌법에 '외국 영토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상실하지 않은 모든 중국인을 통칭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1900년대 초 산둥반도와 인천항을 오가는 여객선이 생기면서부터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도시가 인천이다. 중국인들은 당시 활발한 경제력을 발휘해 무역, 잡화점, 비단 상회, 양장점, 이발소 등이 성황을 이루었고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요식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 이연악은 당시 한국으로 넘어 온 화교라고 생각된다. 마산, 1946년 할아버지는 해산물이 싱싱하고 다양한 채소를 구입할 수 있는 항구 도시에서 중화요리점 ‘신춘 반점’을 경영했으니 그 이전의 삶은 후손들로서도 자세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20년 당시 한국에서의 화교들의 경제력은 대단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때 외국인의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면서 많은 화교들이 정착하지 못 하고 헐값에 재산을 처분하고, 한국을 떠나 유럽이나 미국 등지로 이주를 시작했다. 중국인 이주 100 년의 역사를 통해 차이나 타운이 없는 곳은 한국이 유일했다고 하니 화교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IMF를 거치면서 외국인에 대한 규제가 대폭적으로 완화되어 외국인들도 토지며 건축물 등의 소유가 가능해졌다. 이동혁 대표가 경영하고 있는 현 락희안의 빌딩 소유주가 어머니라고 한 말의 의미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인 산둥반도 그곳을 지도상으로 살펴 보면 우리나라 서해안과 참으로 가까운 곳이지만, 어머니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중국도 한국도 이미 모국이 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다. 1980년 생인 그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나이 두 살 때에 할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셨기 때문이다.


중국 식당의 하루는 양질의 돼지고기를 사다 뼈째 고아 국물을 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짜장면과 짬뽕, 잡채 그리고 탕수육으로 대표되는 중국집 풍경은 한국인의 외식 메뉴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아이가 입학을 하거나 졸업을 하면, 온 가족이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던 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까지의 흔한 풍경이다. 이후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피자, 스파게티가 입성했고, 짜장면을 즐기던 입맛도 서서히 서양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추억과 맛을 자랑하는 중화요리는 맛의 클래스를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여전히 외식 메뉴 시장의 왕좌를 지키고 있다. 짜장면은 화교인 이동혁 대표 외에도 수 많은 한국인의 추억의 음식이다.

 

이 대표는 초등학교 시절 부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 명동에 있는 한성 화교 소학교를 다녔다. 그는 4남2녀 중 차남. 아버지가 들려주는 할아버지 세대의 추억과 아버지의 중국에 대한 향수가 배인 그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아버지는 가끔 집에서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추억은 파티같은 분위기, 온 가족이 함께 아버지가 만들어 주는 특별한 요리를 먹었던 그 기억은 지금도 아름다운 파티의 한 장면 같다고 했다.

어머니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해주시는 음식과는 달랐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한국 음식이라기 보다는 반 서양식 요리라고 해야 할까? 핫도그, 햄버거, 수프. 생전 처음 먹어 본 그 맛은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이었다. 당시 부천에서 서울 명동까지 가려면 새벽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 그 형제들에겐 간편한 핫도그, 수프가 바쁜 시간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간편식이었다. 그 음식의 맛은 한국요리와는 또다른 맛이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한다.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명동의 한성화교학교 생활이 끝나고, 그는 고려 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그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가업을 이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005년 대학을 졸업하고, 2008년 글로벌 회사인 시너지 힐앤놀튼 피알 컨설턴트 회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년 뒤 그는 독일 홍보회사인 바스프 코리아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홍보회사를 다니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모든 제품은 제품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제품을 어떻게 홍보하고 마케팅할 것인가? 그 사실도 제품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점점 연로해 가고,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중화요리는 누군가가 아버지를 도와 그 명맥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자각했다. 바스프 코리아 홍보를 위해 해외 출장을 다니며 제품을 홍보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지금의 자리 1층에 '락희안'이라는 이름을 걸고 그는 가업에 도전했다.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요리 솜씨는 특별했다.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곳에서 회식을 해봤고, 특히 중국 식당을 다녀 보았지만 아버지의 요리는 특별했다. 아버지는 중화요리의 장인이었다.
그는 락희안의 대표가 되던 그해, 목표를 세웠다. 락희안의 2호점 또는 3호점을 세우자는 것과 단순히 돈을 버는 것에 목적을 두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락희안에서 요리를 먹어 본 사람들은 “맛도 좋지만, 건강식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평한다.
“짜장면의 소스를 만들 때 초콜릿 색상의 진한 춘장만을 쓰지는 않습니다. 그 보다 엷은 색상의 된장과 혼합하여 짜장면을 만듭니다.”
그 짜장면은 일반적인 짜장면과는 시각적으로 다르다. 건강요리를 찾아다니며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 맛에 오히려 매료된다고 한다. 물론 건강하게 만든 요리가 반드시 맛있다는 말과 일치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계속 먹다 보면 그 맛의 진가를 알게 되고 마니아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2006년 경기도 철산에 락희안 2호점이 생겼다. "앞으로 몇개의 분점이 더 세워질지 알 수 없지만 음식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맛과 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너무 많은 분점이 생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락희안의 면의 특징은 단순히 밀가루 만을 쓰지는 않는다고 한다. 밀가루와 흑미, 백미, 보리, 메밀을 혼합하여 특별한 면을 만든다고 한다. 식품학을 연구하는 식료연구가 이채윤 같은 이들은 그 특별한 면과 건강을 연계해서 품평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건강을 화두로 삼는 이 시대에 락희안의 도전은 많은 박수를 받을만 하다는 것이다.

기본이 되는 육수의 재료인 돼지고기도 녹차를 먹여서 키운 고기를 사용한다. 일반 돼지고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일반인들은 모를 수도 있다. 식재료비 구입가는 높아지더라도 건강을 위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 락희안의 자부심인 듯하다. 일반 조미료를 많이 쓰게 되는 중국음식, 기름을 많이 쓰는 중국 요리, 순간의 힘을 빌려 불과의 도전에 맞서는 중화요리이기에 더 고민하고 더 연구하는 락희안의 조리실은 직원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그 수고로움에 보답한다. 중국 음식점의 주말은 가족 단위로 외식을 하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온 종일 식재료를 다듬고 준비하고 조리하는 시간은 시간, 분, 초를 다투는 전쟁터와 다를 바 없다. 화교 사회에서 장인으로 칭송받는 아버지 이국태 씨도 이젠 연로해서 무리한 작업시간에 노출되도록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하는 이 대표.

물론 이 대표는 자신이 직접 모든 일에 관여하지는 않는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친환경 소재를 볼 줄 아는 식재료를 담당하는 직원이 있고, 손님과 직접 대하는 서비스 자세, 무엇보다 요리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주방의 요리사 관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서비스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CS (고객 서비스 교육)도 마스터했다. 직원들은 매주 월요일 쉬게 하며 적어도 한 달에 6~8일 정도의 휴가를 준다.

‘음식의 온도’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특별한 소망은 무엇인가.

인터뷰 중 그가 즐겨 쓰는 표현 중에 "음식의 온도를 전하고 싶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음식의 온도란 무엇일까? 혹시 식당을 경영하고는 있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의미일까? 자신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집에서 특별히 해주시던 그 음식을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먹었을 때 느꼈던 행복감, 즐거움, 편안하고 안전한 그 기억을 고객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다소 문학적인 발상일까? 식당의 이름도 자신의 철학이 들어 간 락희안으로 결정했다는데, 음식의 온도에 대하여 단순히 불과 기름의 예술, 중화요리에 대한 일차적인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단순히 음식을 대접하면서 그 대상에게 음식 그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뿌리인 중화요리 사업을 하지만 그곳에 그의 아버지와 그의 가족, 그의 마음이 담긴 따뜻한 인간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휴머니즘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오롯이 느껴졌다.
그의 마음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2017년 중앙 대학교 글로벌 외식산업 최고경영자 과정을 이수하면서 부터였다. 그 수업을 받는 동안 많은 외부 전문가 그룹의 강의가 병행되었는데, 그 중 생각을 변화시키게 하는 한 강사의 수업이 그에게 또 다른 꿈을 꾸게 했다.

중국요리는 할아버지 시대를 거쳐 아버지 시대까지 오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비법이 담긴 중화요리의 대가가 되었지만, 지금 락희안의 장소는 강남의 청담동이나 압구정동, 한남동 등의 핫한 동네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식가들은 이 대표의 아버지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맛보기 위해 그곳까지 찾아와 음식을 즐긴다. 진한 색상의 짜장면이 아닌 중간색상의 짜장면도 선보인다. ‘이가짜장면’은 그 독특한 소스를 개별 포장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수요가 발생했으니 공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작은 상품 하나의 모멘텀이 그에게도, 그의 아버지에게도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일으킨 것이다.

2010년 락희안 1층을 오픈 후 다음해에는 2층으로 확장했다. 중국집의 특성상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대표는 그들에게 넓고 안락한, 그 가족 만이 즐길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을 제공하고 싶어서 무리하게 공간을 넓혔다. 매출 대비 앞날에 대한 비전을 바라보며 투자를 감행한 것이다. 그의 희망대로 넓고 아늑한 공간에서 제대로 된 중국요리를 먹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 왔고, 입소문이 나면서 락희안은 제2의 도약을 꿈꿨다.

메뉴는 약 30가지를 준비하고 있다. 일반 대중들은 그곳에서 특별한 요리를 맛보고 싶어 한다. 한국인 주방장은 맛내기 힘든 진정한 중국인 주방장의 요리, 꿔바로우라고 알려진 찹쌀 탕수육, 그 가게 문앞에 붙어 있는 아버지의 비기, 철판 누룽지탕. 그 중 현재 유일하게 패키지가 가능한 건 짜장면 소스이다. 짜장면 한 품목 중 ‘이가짜장면 패밀리소스’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반제품의 개발, 한국인들이 이곳 락희안의 식당을 벗어나 다른 가족과도 함께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반제품을 구상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흔히 중국요리는 기름과 불의 예술이라고 알려져 있다. 즉 신선한 재료와 깊이가 다른 중국 조리기구 웍 속에서 화려한 불꽃을 튀기는 요리과정은 한편의 순간 예술이나 마찬가지이다. 낮은 온도에서는 도저히 그 맛과 색상을 낼 수 없는 것이 중국요리의 특징이다. 뜨거운 기름과 재료가 만나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요리는 이대표가 주장하는 ‘음식의 온도’를 충분히 연상할 수도 있다. 물론 이대표는 그런 물리적인 온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락희안에서 음식 뿐만 아니라 추억과 사랑을 나누는 공간이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흔히 여성들이 학창 시절을 되돌아 볼 때 학교 앞 우동집, 비빔냉면집, 만두집, 떡볶이 집에서 수다를 떨며 맛있게 먹었던 음식과 함께 그 소녀 시절을 추억하는 것처럼, 먼저 음식을 떠 올리고 이어 다가오는 추억의 순간들, 그런 장소가 락희안이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 가는 것. 그러나 기억은 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인 만큼 단순한 음식에서 마음에 남겨지는 추억의 한 단면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한 가족이 또는 연인이, 친구가 락희안에 와서 음식을 먹을 때 , 그 순간을 나중 어느 땐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요리장인인 아버지 이국태의 이가월병,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과자를 기대한다.

그는 어린 시절 집에서 아버지가 온 가족을 모아 두고 맛있는 중국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기억한다. 그것은 파티였다고 회상한다. 아버지는 집안에 있는 일반 가스레인지로는 맛을 낼 수 없는 요리였기 때문에 특별한 화력을 낼 수 있는 버너를 마련하여, 중국요리의 맛을 낸 깐소 새우(칠리소스)를 먹이고, 또 다른 맛있는 중국요리를 만들어 주면서 중국인의 뿌리를 각성 시키는 그 순간을 그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듯이 그는 비록 민족의 뿌리는 다르지만, 음식을 통한 소통의 방법, 사랑의 온도를 느꼈으면 하는 것이 그의 염원인 것 같다.
그의 생각은 락희안에만 머무르고 있지는 않다. 중국 요리에는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종류가 많이 있다. 그 중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이 월병의 전설이다. 양귀비와 당 태종의 이야기가 인상적인 월병은 내용물에 따라 다양한 월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월병이라는 이름의 역사를 따라 가 보자. 중국 양귀비와 당 태종의 시절, 매년 중추절이 되면 중국인들은 월병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우리의 송편에 해당하는 과자 또는 음식이다.
양귀비와 당 태종은 달빛 아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수박, 석류, 포도 등 그 여름 계절에 나오는 과일 속에 월병(당시에는 과자의 이름이 없었다고 추정)이 있었는데, 당 태종이 양귀비에게 이 과자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그 과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달달한 것도 있고, 짭짤한 맛도 있고, 속이 들어 있는 것도 있고, 속이 빈 것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월병이라는 과자는 종류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둥근 것, 네모난 것도 있다고.

양귀비는 그 중 속이 들어 있는 과자를 집어 입에 물었는데 입맛이 좋아 궁중 요리사를 불러 그 과자의 이름을 물었으나 그 역시 이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당 태종은 양귀비에게 “그러면 귀비가 이 과자의 이름을 지어 보시오”라고 말했다는 것. 둥근 과자를 내려다 보던 양귀비는 이윽고 찬란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둥근 달을 바라 보면서 달 월, 과자 병의 월병(月餠)이라는 이름이 탄생되었다는 것. 물론 전설로 내려 오는 양귀비와 태종의 일화이지만, 워낙 중국인에게는 유명한 두 사람이기 때문에 월병은 어찌되었든 기분 좋은 중추절 과자로 알려져 오고 있다.
월병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대표가 생각하는 월병의 대가는 자신의 아버지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뜨거운 조리실에서 힘든 음식 조리를 하기 보다는 ‘이가 월병’으로 상시 판매할 수 있는 제품으로 승부를 내고 싶다는 계획이다.

락희안은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 1층 작업실은 중추절이 가까워지면 주문에 따라 월병을 만드는 이버지의 월병 제작실로 변신한다고 한다. 그는 중추절 외에도 얼마든지 이가 월병 명인으로서 제작, 홍보, 마케팅이 가능하다고 내다 본 것이다.

그는 그 외에도 중국 요리의 간편식 식품을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싶은 꿈도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 요리 중에 스파게티 소스가 일상화 된 것처럼 그는 다양한 요리의 간편식을 개발하여 온라인 사업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요리의 DIY 신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즉 넓은 의미에서의 무역인 셈이다. 그가 독일의 홍보회사 바스프 등에서 근무한 경력이 우연이 아닌 것같다.

그는 락희안의 문을 연 이후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장인이 될 것인가, 상인이 될 것인가?" 즉 이 고민은 상인이 되어 돈에만 집착하는 사람과 일의 중요성과 뿌리만 역사만 중히 여기는 장인으로서의 삶을 고민한다는 뜻이다. 그의 결론은 이러했다.

“장인 정신을 가진 상인이 되자.”
“Food will bring you pleasures”


락희안 2층 식당 벽면에 새겨진 두 개의 경구이다

글_최금숙 사진_Jukerman Ba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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