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의 추억 ‘봉숭아’
여름방학의 추억 ‘봉숭아’
  • 김문기
  • 승인 2019.08.12 14: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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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꽃이 내 손톱을 물들이는 것은 색깔이 입혀지는 단순함 만은 아니었 다. 밤새 손을 벌린 채 자려 애쓰며 아침에 일어나면 손톱이 변하듯 내게도 어떤 변화가 올 것 같은 막연한 기대로, 설렘 속에 동화 속 왕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 여름, 밤이면 논가에 늦반딧불이가 화려한 군무를 펼쳐 우리를 놀라게 했고, 한낮의 더위를 피해 툇마루에 누우면 뒷산에서 울던 쓰름매미의 청량한 울 음소리가 더위를 잊게 했다.

장마가 지나고 불청객으로 찾아온 무더위와 습한 공기가 심신을 지치게 만들고계속되는 열대야가 밤잠을 설치게 하여 많은 이들이 날씨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는 8월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8월 중순이 지나면 해수욕장이 폐쇄되고 낮 동안은 햇살이 따가워도 밤이면 시원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지만이제는 9월 중순 까지도 더위를 견디며 보내는 날이 많아져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 온난화 현상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변화를 더욱 혹독하게 겪으며 살아갈 아이들을 생각하면 무거운 마음의 짐과 안타까움에 특단의 해결책이 빨리 나오길 간절히 바라며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친환경적으로 바꾸어야 할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여러 걱정과  더위 탓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 짜증과 피곤에 시달리는 우리에게그래도 8월이 다른 달보다 기다려지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여름방학에 대한 추억과 기다림 때문일 것이다휴가나 방학으로 심신을 달랠 수 있는 8월에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분들도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을 통해즐거움과 행복으로 잠시나마 더위를 잊는 여유를 누리시길 바란다.

내가 자란 치악산 자락에서 `봉숭아`는 8월이면 가장 꽃의 색이 진하게 피었다`봉선화`과에 속하는` 1년생인 이 꽃은 높이가 30~60cm 정도로 곧게 자라고 잎은 가는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줄기는 연한 녹색에 아래로 갈수록 붉은 색을 띄며 꽃은 6월말 경부터 9월초 까지도 핀다중국남부동남아인도 등이 원산지로 알려진 이 식물이 고려 시대의 기록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우리와 맺은 인연도 길어 토종식물과 다를 바 없는 친근감을 갖게 된다. `봉선화`로도 불리며 분홍색붉은색흰색주황색의 꽃이 피며 꽃의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 닮아 `봉선화`라 불렀고후에 발음의 변화로 `봉숭아`라고도 불리며 둘 다 공식적인 명칭으로 혼용된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여름 꽃으로 뱀이나 해충이 싫어하는 냄새가 있어 예로부터 시골집의 담 아래나 장독대에 많이 심어 `울밑에 선 봉선화야~`라는 노래가사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고 뱀을 쫓는다는 의미에서 `금사화`라고 불리기도 한다공해에도 강해 도심의 화단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우리에게 한줄기 소나기 같은 선물을 주는 고마운 꽃이다.

꽃은 2~3개씩 잎겨드랑이에 달려 피며다섯 개의 꽃잎이 이루고 있는 모습은 예쁘면서도 유혹의 화신 같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홑겹과 겹꽃이 피는 종이 있으나 요즘에는 인간의 기호에 맞추어 품종개량을 한 탓에 홑겹 꽃을 보기 어렵다열매는 삭과로 잔털이 있으며 익으면 풍선처럼 탄력 있게 터지며 씨를 흩뿌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라는 가요의 가사에도 그 특성이 표현되었고꽃말도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Do not touch me)` 인 것이 잘 어울리는 꽃이다.

`봉숭아`는 약성도 뛰어나 단단한 것을 무르게 하는 놀라운 효능이 있어 생선이나 고기를 요리할 때 씨앗을 넣고 끓이면 뼈가 물러지고 가시는 녹고 고기가 연해지는 효과가 있다그 외에도 어혈을 풀어주고 통증완화와 부종을 가라앉히는 약성과 여성관련 질환에도 약효가 있고암이나 해독용제로도 쓰이는 널리 이용되는 약성이 풍부한 식물이다.

약효가 신속하게 나타나 씨앗을 `급성자`라 부르기도 하며강한 약성 탓에 지식 없이 복용하면 유산이나 기타 여러 위험이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전문가의 처방을 따라야 한다흰 홑겹의 꽃이 피는 `봉숭아`가 가장 약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요즘은 귀해져 보기가 쉽지 않다.

`봉숭아`는 무엇 보다 손톱을 붉게 물들이는 식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려시대 충선왕 관련 기록에도 이 풍습이 언급 되어 있어그 대중성과 유래가 얼마나 오랜 것인지 느끼게 된다손톱을 물들이는 일은 붉은색이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동양적 정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조금이라도 예뻐지고 싶었던 여인들의 절실함이 만든 화장법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인간이 미를 추구하는 것이 본능에 가까운 욕망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이 꽃의 사촌으로는 여름부터 초가을 까지 약간 습한 곳에 피는 `물봉선있다우리 토종 식물인 `물봉선`꽃은 `봉숭아`꽃과 비슷하나 훨씬 더 관능적이고 붉은색노란색흰색의 꽃이 피며 씨앗을 터뜨리듯 튕겨내어 번식하는 특성도 비슷하다.

 

50여 년 전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방학의 대부분을 치악산 자락 아래 있는 외가에서 보냈다겨울방학에 비해 산과 들과 냇가가 모두 놀이터가 되는 여름방학은 그야말로 우리들 세상이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각인된 시간이다외할머니와 나보다 10여년 위였던 막내 이모와 보낸 시간이 많았고거의 매일 쏘다니며 노느라 얼굴이 까매지고 등과 어깨의 살은 햇빛에 그을려 벗겨져도 즐거웠던 날 들 이었다.

그 후로 다시는 그런 시절을 갖지 못하고 쫓기듯 어른이 된 것은 비슷한 시기를 겪은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정서일 것이다그 당시 8월 중순 경이면 개학을 앞두고 밀린 숙제를 하느라 쩔쩔매던 내게 이모는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셨다.

8월에 가장 진한 색의 `봉숭아꽃과 잎을 따서 백반과 섞어 빻아 손톱에 올리고 잎이나 유지로 덮은 후 무명실로 둘러싼 채 잠을 자고 일어나면 손톱과 손가락 끝부분이 빨갛게 물들었던 기억이 새롭다가끔은 자다가 뒤척여 `봉숭아`덩이가 빠져 삼베 이불을 물들여 혼난 적도 있고가끔은 손가락 끝이 아리는 아픔도 겪었다.

오래되어 기억이 아스라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물들이는 손톱이 달랐던 것 같았고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모의 말에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며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있다. 8월 중순 `봉숭아`가 마지막으로 필 무렵 손톱에 물을 들이는 일은가능한 손톱의 붉은색이 첫눈이 올 때 까지 남아있게 하려는 이모의 바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사춘기에 들어서였다.

 

학교에서의 용의검사 (손발톱과 세안 양치 여부를 주간단위로 선생님이 검사 하는 일때문에 첫 눈이 올 때까지 내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던 적은 없었다다만 내 가슴을 콩닥 거리게 했던 이름도 가물가물해진 옆 반 그 여자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에왠지 모를 아련함이 밀려오는 것이 내 나이 탓인지아니면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봉숭아`꽃이 내 손톱을 물들이는 것은 색깔이 입혀지는 단순함만은 아니었다밤새 손을 벌린 채 자려 애쓰며 아침에 일어나면 손톱이 변하듯 내게도 어떤 변화가 올 것 같은 막연한 기대로설렘 속에 동화 속 왕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그 여름밤이면 논가에 늦반딧불이가 화려한 군무를 펼쳐 우리를 놀라게 했고한낮의 더위를 피해 툇마루에 누우면 뒷산에서 울던 쓰름매미의 청량한 울음소리가 더위를 잊게 했었다담장 너머로 나를 바라보던 해바라기와 담 아래서 수줍게 고개를 떨어뜨리던 `봉숭아`꽃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아 시간이 허락 한다면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짧은 여름밤이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동녘이 훤히 밝아오는 요즘이다심란한 마음을 추슬러 내일은 `봉숭아`꽃을 따서 손자의 손톱에 물을 들여 주어야겠다.

제 엄마가 출근 할 때마다 옆에서 매니큐어를 칠해 달라고 떼쓰는 녀석에게 할아버지의 선물은 또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월간 사람'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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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식 2019-08-12 18:54:40
김문기 작가님! 옛날 생각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