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덩이로 빚어진 삶을 망치로 두드린다”
“쇳덩이로 빚어진 삶을 망치로 두드린다”
  • 박중하 기자
  • 승인 2021.01.1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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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철공소 황용복 대표
농삿일을 뒤로 하고 홀홀단신 상경해 지금껏 망치를 놓지 못하는 대장장이 황용복 경남철공소 대표. 예나 지금이나 시계추처럼 아침 일찍 문을 열고 근육질 일꾼들의 방문을 기다리지만 찾아오는이들 뜸하다는 게 또한 일상이다. 세상이 변하여 추억이 되어버린 철공소를 놓지 않고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이 다 변했다고 해도 언제나 똑같아 보이는 건 늙은 대장장이의 삶이 쇳덩이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일까?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들라 하면 늘 등장하는 것이 도구다. 말 그대로 도구란 인간의 몸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생산성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든 인간의 능력을 수십 배 혹은수백 배 키워주는 대단한 발명품 탄생의 산파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다만 도구의 형태란 인간이 행하려는 작업 형태에 최적화되어있고 그것을 다루는 자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특이점이기도 하다. 즉 도구는 실제 만들어지기로는 가장 완벽한 결과물을 생산해내도록 고안됐지만 그것이 최종적으로 빚어낸 물건 혹은 생산품은 오롯이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능력에 비례한다는 게 흥미롭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쯤 생겨나게 된다. 좋은 도구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설계되고 제작되어 누구든 그것만 사용하면 최고의 결과물이 나오게 해주는 것일 터인데, 다들 아다시피 그런 경우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잘 만들어진 도구일지라도 다루는 사람들의 재주가 일천하다면 그저 나무조각, 쇳덩이에 불과 할테니 말이다.

덕분에 손때 묻은 오랜 도구들을 보면 다루는 이의 성격과 생김새를 고스란히 빼박았다고들 한다. 결국 좋은 도구라고 하면 다루는 이가 잘 쓰기 때문이지 본래의 품성은 좋고 나쁘고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도구를 만든 사람은 어떨까? 온통 좋거나 혹은 나쁜 도구를 만드는 그 사람은 어떠하냐는 것이다. 뭔가 특별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 혼자 만의 생각일까? 그래서 궁금하던 차에 그런 사람을 한 번 찾아나섰다.

 

장소는 오래전 어르신들이 시체가 나오는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屍軀門)’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광희문 (光熙門)’ 인근의 허름한 철공소다. 한 오십 년 전 만 해도 이 동네에는 지금의 철공소와 비슷한 업장이 꽤 많았다. 척 보이기에도 일반적인  가게와는 달랐다. 안쪽에는 좁긴 해도 갖출 것은 다 갖춰진 철물 제조를 위한 장비들이 있었고, 가게 앞마당은 그곳에서 만들어진 가지각색의 도구들을 내놓고 파는 소매상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으니까. 지금은 어떻냐고 물어본다면 이 가게 주인  말처럼 “다 죽었다”고 보는 게 옳겠다. 주문이 넘쳐나서 하루종일 풀무질에 ‘마치’를 두드릴 일이라고는 없으니 늘어놓은 것들 만이라도 팔리면 감지덕지니까. 그럼에도 문을 닫을 수도 없는 건 수십 년 시계추처럼 살아와서인지 그 시간에 나왔다가 문닫고 퇴근하지 않으면 몸뚱이마저 “다 죽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서다.

앞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동물 만큼이나 닮은 습성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그건 다름아닌 그리움이다. 잊지 못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행태말이다. 나서 어릴 때 늘 보아왔던 기억 속의 장면들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사는  습성이 동물과 매 한 가지이고 보면 허름하다 못해 다 쓰러져 갈 것같은 이 철공소 앞에서 눈에 익은 장도리며, 톱이며, 갖가지 연장들을 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비슷한 기능을, 아니 더 훌륭하고 강력한 성능을 지닌 최신식 도구들을 대형마트에서 쉬이 볼 수 있긴 해도 이런 감동과 애틋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한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땟국물 꼬질꼬질하기에 더 그리움에 사무치게 되는 그곳, 오래된 철공소에 들러 보았다. 지금이나마 안 가보면 영영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못볼 것같아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내 이름 황용복이라고 한다. 대장장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예전에는 광희문 옆에 있다고 광희동이었지만 지금은 신당동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경남 철공소를 하고 있다. 올해로 42년째다.

말 그대로 장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런 철공소를 한다던데, 옳은 표현이라고 보는가.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먹고 살자고 해서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다.

어떤 계기로 철공소를 하게 됐나.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이 고향에서는 농삿꾼으로 살았다. 먹고 사는 게 정말 힘들어서 집안 식구들 중에 누구 하나라도 서울가서 자리잡고 있으면 어떻게든 상경해서 돈벌 궁리를 하던 시절이었다. 제 아무리 험한 일을 하더라도 시골에서 농사짓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사촌 매형되는 분이 지금의 경남철공소를 하고 있었다. 일손이 딸리니까 올라와서 도와달라고 하니 이게 기회겠거니 했다. 마침 결혼도 한 상황이라서 돈이 필요했다. 고민할 이유 가 없었다. 그게  1978년의 일이다.

본래 이런 일은 할 줄 았았나.

전혀! 농삿꾼이 호미나 쇠스랑 같은 건 만져봤다지만 정작 그것을 만들 줄은 몰랐다. 어쨌든 서울에 올라 왔으니 뭐든 해야했고, 철공소 일을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지만 어깨너머로 배우고 익혀서 지금 이런 날이 왔다.

황용복 사장님은 올해 춘추가 어찌되시는지.

아버지가 한 해 늦게 출생신고를 한 덕분에 51년 생이다. 본래는 50년 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올해 일흔이다.

서울에 올라와 할 줄 모르는 일을 했다면 가히 쉽지 않은 나날이었을텐데.

아내와 아이들 보살필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냥 고향에서 지냈겠지. 남들보다는 쉽게 서울에 왔다지만 결코 쉬운 나날은 아니었다. 더욱이 사촌 매형이 워낙 깍쟁이 같은 사람이라서 쉽지 않았다. 일은 죽어라 부려먹으면서 월급은 안 주는 것을 밥먹듯 했으니까. 그럼에도 당시는 시절이 좋아서 가게가 먹고 살만 했다. 그만큼 일거리가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고 해야겠다.

솔직한 이야기로 이곳의 온갖 도구들이 지금 시대에 과연 쓰일 데가 있을 지가 의문이다.

당연히 이런 물건들이 요즘의 건설현장 같은 데서 필요할 리가 없다. 실제로 하루에 단 한 개도 안 팔리는 게 당연하다고 내 스스로 그리 여긴다. 그런데 희한한 건 이런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들러서 뭔가 사들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문을 닫지도  못한다.

오래 전으로 돌아가 보겠다. 예전에는 북적북적하던 때도 있었다는 건가.

당연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잘 되던 시절도 있었다. 자, 생각해보라. 지금은 온갖 최신식 기계들을 가져다가 뚝딱뚝딱 집을 짓는다지만 4~50년 전만 해도 그런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사람의 몸뚱이를 움직여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새벽 일찍 가게문을 열기 전부터 일꾼들, 공사장 십장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망가진 공구를 손보러 들르기도 하고, 작업장에 인부들이 늘어서 그에 맞게 공구를 맞춰가야 했으니까. 전동공구 같은 건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였고 작은 못 하나, 굵은 철근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람의 손을 빌어야 가능했다.

당시에 가장 인기있던 공구는 어떤 것이었나.

철근 자르는 공구가 가장 잘 팔리던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요즘 같으면 공사가 시작하기 전부터 길이에 맞춰서 다 만들어진 재료들의 형태로 현장에 배달되지만 그때만 해도 길다란 철근이 묶음으로 배달되어 오면 일일이 잘라서 사용해야 했다. 워낙 강한 철근을 잘라야 하는 것인 만큼 공구들이 금세 망가지니까 철공소 입장에서는 돈벌이가 짭짤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공구였기 때문에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전동식, 자동화된 제품이 나왔다. 결국 요즘은 영화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당시만 해도 철공소는 아주 벌이가 좋은 업종이었다. 한 달에 6~7백만 원은 너끈히 벌었으니까. 지금 돈으로 따져보면 몇천만 원은 될 거다. 지금? 월세도 내기 힘들다.

 

서울에 올라올 때 결혼한 이후였나.

그렇다. 당시의 시골사람들 다 그렇듯이 얼굴도 안 보고 결혼했다. 집안 어른들이 중매하고 그렇게 만나 서 결혼하는 식이었다. 다만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아이들 혼자 키우느라. 식구들 남겨두고 홀홀단신 서울에 온 터라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 고향에서 꽤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오래된 공구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솔직히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물건들을 내놓고 파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다. 나부터가 뭔가 만든다고 할 때 공장에서 찍어낸 공구를 싼값에 쉽게 구해서 쓸텐 데 굳이 불편하고 기능도 턱없이 부족한 이런 물건을  누가 찾겠나 싶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더욱이 요즘은 기름때, 흙투성이로 범벅이 된 날품팔이 인부들이 아니라 말끔하게 차려 입고 가족단위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세상이 많이 바뀐 거겠지?

가족단위에 말끔하게 입은 사람들이 고객이라니.

나도 그게 좀 놀라운 데, 요즘 가장 큰 고객은 주말 농장이라든가 텃밭을 가진 가족 손님들이다. 이 사람들 찾는 농기구들도 꽤 다양하다. 호미, 쇠스랑, 낫은 물론이거니와 전문적인 농삿꾼들이나 쓸 법한 것들까지 찾는다. 큰 돈은 되지 않지만 지난 몇년 동안 새로운 고객들이 늘어난 셈이다. 물론 예전 건축붐이 불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변화이긴 하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가장 무서운 것은 잊혀진다는 것인데, 적어도 농기구와 철공구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우리의  후세들에게 색다른 방식으로라도 기억된다는 건 기쁜 일이니까.

가장 큰 위기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역시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으뜸인가.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랜 세월을 존재했었고 또한 우리 곁에 있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쓸모 없어지고 기억 속에서 조차 지워지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의 역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게문을 열고 가끔 멍하니 앉아서 눈 앞에 늘어놓은 갖가지 도구들과 농기구를 바라보면서 이것들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저 단순히 돈벌이가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치 내 자신, 아니 우리의 모든 삶 속의 한 부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곤 한다. 한편으로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면서 여기서 보여지는 갖가지 문화의 흔적들이 쉽사리 거래되는 것을 보면 또다른 걱정이 앞서 기도 한다. 사실상 이런 전통적인 제작방식의 도구들은 사용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닮아있어야 하는 맞춤복 같은 물건이다. 그런데 그저 스마트폰 두드려서 사진으로만 보고 덜컥 사들일 수 있는 물건이 되다보니 그 생명력 또한 짧아지는 게 당연하다는 게 문제다.

 

당연히 손으로 일일이 두드려서 만드는 공구들인 만큼 같은 게 하나도 없겠지만 생명력까지 이야기 한다는 건 무리가 아닐지.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좀 우스꽝스럽지만, 예전에는 호미 하나를 팔아도 간단한 게 아니었다. 사용할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물을 캘 때 쓸 것인지 돌밭을 고를 때 쓸 것인지, 손이 큰지 작은지 나름대로 갖가지 사항을 눈여겨 보고 이에 맞는 호미를 골라서 쥐어주는 게 일상이었다. 그냥 쌓여진 것들 중에서 덜렁 골라주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맞춰줘야 일하기에도 편하고 망가지지도 않으니까. 농기구든 공구든 사용하는 사람을 닮아가기 마련이다. 철공소의 대장장이는 그저 쇳덩이만 두드리는 게 전부가 아니다. 사용할 사람과 궁합도 맞춰주는 게 중요한 일이다. 인터넷으로 사진만 보고 그게 가능할리 만무다.

주어진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당연히 철공소를 운영하는 일이다. 도통 수입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월세만 70만원이다. 호미 몇 개 팔아서 월세값이나 나올까? 사람들은 장인이네 뭐네 이야기 하지만 어차피 직업이라고 하면 먹고 사는 문제부터 풀어야 하는 게 숙명이다. 철공소의 어려움이란 현대화에서 뒤처지고 최신기술과 맞서지 못하는 데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전통문화와 같은 쪽으로 바라볼 수도 없기 때문에 참으로 애매한 입장에 놓여있다. 결국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데 이제 수적으로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철공소가 버텨내기란 쉽지 않다는 얘기다. 한편으로는 이 또한 사업이니 오랜 시간을 두고 끌고 가야하는 것인데, 대를 이어서 한다는 것도 요즘 시대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내 대에서 끝을 봐야 하는데, 그것 또한 쉽지 않다.

어디를 가보든 요즘은 외국사람들이 이른바 힘든 일을 도맡아서 하는 게 일상의 풍경인데, 철공소의 경우는 그런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게 참 기가 막힌 이야기다. 내가 젊을 때만 해도 일이 쉽든 힘들든 가리지 않고 돈 벌 수 있다면 마다하 지 않았다. 물론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그랬다지만 요즘은 조금만 힘에 부치는 일이라면 다들 꺼린다. 그러니 걸맞는 일자리가 있을 턱이 없다. 적어도 철공소의 일거리가 힘겹기는 해도 가치있는 일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힘들 거라며 다들 피한다. 그나마 벌이가 좋지 않아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서지 않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철공소에서도 외국인들 보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일과가 어떤 식으로 채워지는가.

봉천동에 살고 있는데, 아침 6시면 나와서 가게문을 연다. 수십 년을 그리 살아왔으니 그리할 뿐이다. 예전만 해도 새벽이면 가게 앞이 북적댔지만 지금은 아무도 안 온다. 괜히 속상해 하면 나만 힘드니까 혼자서 놀듯이 이것저것 만들면서 소일하는 식이다.

가족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없나.

쇳덩이 두드려서 자식들 공부시켰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지만 실제로도 바라는 게 없다. 줄 것도 없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일거리를 이끌어 갈 생각인가.

만들어진 기구들이 이제는 박물관에 들어갈 정도로 쉬이 보기 어려운 것들이 되었다. 아마도 이 가게가 문을 닫을 즈음에는 세상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것들이 될 게 분명하다. 사람들은 늘 잃어버린 뒤에서야 그리워 하고 후회하는 습성을 지녔다. 모르긴 해도 철공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없어진 다음에서야 “예전에 철공소라는 게 있었다지?”라면서 아쉬워 할 게 분명하다. 이곳에서 만들어 파는 기구가 수십 가지가 넘지만 정작 요즘 사람들은 그게 무엇에 쓰는지 조차 모르는 게 태반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게다. 큰 기대는 안 하지만 가게를 찾아오는 ‘주말농장 고객들’에게 만이라도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야 잊혀 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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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에 서울로 올라와 여전히 쇠망치와 살아가는 대장장이 황용복 씨는 여전히 본인과 똑닮은 기구들을 만드는 삶에서 한 치의 변화도 없어 보인다. 그저 주변의 모습과 세상사람들의 모양새만 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세상의역사가 커다란 수레바퀴와 같다면 언젠가 구질구질하기 이를데 없는 철공소 또한 지금 이 순간의 서글픈 나날도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와 황금기를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상상력을 펼쳐보는 건 무리한 발상이겠지.

순간 늙은 대장장이의 깊게 패인 주름 속에서 보여진 그리움, 서글픔 그리고 외로움이 가게 한구석의 벌겋게 녹슨 호미 한 자루와 닮았다고 느껴졌다. “시간내어 또 들르겠다”는 덧없는 인사말에 “와 봤자 보여 줄 것도 없으니 오지 마소!”라 답하는 대장장이 황용복의 한 마디가 요즘 세상사를 외마디로 표현해준 것이겠다. 다만 아직은 잊혀지지 않은 모습을 내 눈으로 보고 들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줄 수 있었으니 됐다고 여기면서....

글/박중하 기자, 사진/Jukerman Ba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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